붉은 달 아래에서

규장각 숨겨진 이야기 9화|닿을 듯 닿지 않는 거리

규장각 숨겨진 이야기 2026. 5. 4. 15:04

그날 밤,
서연은 또다시 같은 꿈을 꾸었다.


붉은 달.

하늘을 가득 채운 붉은 빛 아래,
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.

얼굴은 보이지 않았다.
하지만 이상하게도
그 시선만큼은 너무도 선명했다.

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.

서연은 꿈속에서 한 발짝 다가갔다.

그리고 그 순간,

사각~

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.

눈을 떴다.

숨이 가쁘게 차올라 있었다.

방 안은 조용했고,
등잔불만이 작게 흔들리고 있었다.

서연은 한참을 그대로 앉아 있었다.

“…또야…”

같은 꿈이었다.

몇 날 며칠째 반복되고 있는,
설명할 수 없는 꿈.

그저 기분 나쁜 꿈이라기엔,
너무 또렷했다.

그리고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았다.또한

점점 더 현실처럼 느껴지고 있었다.

그날 낮.

서연은 이유 없이 발걸음을 멈췄다.

시장으로 가던 길이었다.

늘 다니던 길인데,
오늘은 이상하게도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.

무언가가…
자꾸만 시선을 끌었다.

서연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.

멀리,
궁 쪽이었다.

그곳에서
누군가가 자신을 부르고 있는 것 같은 느낌.

이유도 없이 가슴이 조여왔다.

“…왜 이러지…”

말은 그렇게 했지만,
시선은 끝내 떨어지지 않았다.

같은 시각.

궁 안 깊숙한 곳.

세자는 한 장의 문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.

사각~

조용히 종이를 넘긴다.

그의 손이 멈춘 건,
아주 사소한 한 줄 때문이었다.

“서연.”

그 이름이 적혀 있었다.

아무것도 아닌 기록이었다.
그저 스쳐 지나갈 수 있는 이름.

그런데

이상하게도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.

세자는 다시 한 번 그 글자를 따라 읽었다.

“…서연.”

이름  두자 인데  
가슴 어딘가가
묘하게 흔들렸다.

바람이 스쳤다.

창이 아주 조금 흔들린다.

세자는 고개를 들었다.

이유 없이,
궁 밖이 신경 쓰였다.

보이지도 않는 어딘가에
시선이 붙잡힌 듯했다.

같은 순간.

궁 밖 골목.

서연의 옷자락이 바람에 흔들렸다.

서연은 순간 뒤를 돌아봤다.

누군가가 있는 것 같았다.

분명

방금까지.

하지만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.

서연은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.

설명할 수 없는 기분.

누군가와 스쳐 지나간 것 같은 느낌.

손에 닿을 듯 말 듯

아주 가까이 있었던 것 같은데.

“…이상해…”

작게 중얼거린다.

하지만 발걸음은 다시 움직였다.

한편으로 며칠 전에 그 사내가 생각났다.


궁 안.

세자는 문서를 내려놓았다.

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.

이유는 알 수 없었다.

그저

지금 이대로 앉아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.

그는 천천히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.

그 시각,

궁 밖 골목 끝.

서연이 막 그 자리를 떠난다.

그리고

몇 순간 뒤.

세자가 그곳에 도착했다.

바람이 스쳤다.

아주 잠깐,

누군가가 있었던 흔적처럼.

세자는 걸음을 멈췄다.

그리고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.

“…방금…”

낮게 중얼거린다.

분명

누군가가 있었던 것 같은데.


그 순간.

골목 끝, 멀어진 자리에서

서연도 동시에 멈춰 섰다.

그리고,

아주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.

하지만

두 사람의 시선은

끝내 닿지 않았다.

그날 밤,

붉은 달은 더 또렷하게 떠올랐다.

그리고

서로를 알지 못한 채,

두 사람은 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.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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